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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한다. 고로 존재한다.<한겨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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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주아이쿱 작성일15-11-19 10:22 조회3,1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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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 협동조합 특집호 내용을 소개합니다.

협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최근 서울 시민들은 낯선 택시를 종종 마주친다. 모범택시는 검다. 일반택시는 주홍색이고 개인택시는 하얗다. 그런데 밝은 개나리색 택시가 등장했다. 허리에는 ‘Coop Taxi’라고 써붙였다. 한국에선 처음이자 아직까진 유일한 택시협동조합 소속 택시들이다.
노란 택시가 태어난 배경에는 사납금 제도의 폐해가 있다. 하루 12시간 주말 없이 일해도 택시기사의 월평균 소득은 대략 130만원. 소득 가운데 일부는 차량정비와 사고처리비에도 써야 한다. 2013년 2인 가구 평균 생활비가 230만원이니 한 가족이 생계를 꾸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쿱택시 석 달여 만에 반석에 올라
 
 택시기사는 매일 10만~12만 원 정도를 사납금 명목으로 회사에 내야 한다. 그 이상을 벌면 자신의 소득이 되지만, 그 이하라면 기사의 개인 비용으로 사납금을 채운다. 이 때문에 휴무 승차, 승차 거부, 신호 위반, 난폭 운전, 장시간 운전 등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2013년 3월 MBC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10시간 동안 택시를 몰며 부지런히 서울 시내를 달렸지만 사납금을 채운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택시기사들은 이 무모한 도전을 일상의 생계로 이어가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승객에게도 돌아간다.
 개인택시 면허를 받는다면 사납금을 피할 수 있겠지만, 택시 수를 제한하는 총량제 도입 이후 신규 면허를 얻는 것이 어려워졌다. 오랫동안 무사고로 법인택시를 몰았다 해도, 기존 개인택시 면허자로부터 이를 양도받으려면 1억원 이상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택시기사에겐 언감생심이다.
 전직 국회의원이자 한때 택시기사이기도 했던 박계동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은 “그렇다면 협동조합이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택시기사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하고 가스충전소에서 전단지를 나눠줬다. 157명이 모였다. 그들 대부분은 출자금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저신용자라 대출도 어려웠다. 협동조합 책을 싸들고 설명하러 다닌 끝에 하나은행·서울보증보험·한국택시협동조합이 3자 협약을 맺고 은행 대출을 승인했다.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2015년 7월14일, 서울시청 앞에서 출범식을 열고 운행을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택시협동조합은 탄생 석 달여 만에 반석에 오르고 있다. 조합의 수익은 사주나 주주가 아닌 조합원에게 배당된다. 한국택시협동조합은 7월에는 기본급과 더불어 50만원, 8월에 60만원, 9월에 63만원을 택시기사들에게 배당했다. 기본급은 다른 택시회사와 동일하지만 배당 때문에 임금이 늘었다. 택시기사에게는 50만원 상당의 복지카드도 제공된다.
 임금이 올라가자 변화가 생겼다. 사고부터 눈에 띄게 줄었다. 이 정도 규모의 택시회사에선 월 10건 정도의 교통사고가 발생하지만, 한국택시협동조합 소속 택시는 지금껏 한 건의 사고도 겪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정말 자기 회사처럼 여기기 때문”이라고 박계동 이사장은 말했다. 한국택시협동조합 김수혁 본부장은 “택시기사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결국 기사와 승객 모두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지만, 협동조합에선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출범 100일을 넘긴 한국택시협동조합은 이 모델을 부산·대구·광주 등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행복한 일터 실천한 해피브릿지협동조합  
 
 먹고사는 문제의 출구를 협동조합에서 찾는 것은 택시기사만이 아니다.
 해피브릿지협동조합은 안정적이고 품위 있는 일자리 제공을 목표로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사례다. 이 조합의 뿌리는 쌀유통 ‘주식회사’다. 당시 송인창 사장은 ‘행복한 일터’를 만들고 싶었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대안적 고용모델을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고 싶었다. 3년 전 협동조합기본법이 생기자마자 주식회사를 접고 협동조합으로 변신했다. 이제 사장이 아니라 협동조합 이사장이 됐다. 사원·대리·과장·부장 등 직원 140여 명 모두 회사의 주인이다.
주요 사업은 외식 프랜차이즈다. 대표 브랜드로는 국수나무, 화평동 왕냉면 등이 있다.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 조합원들을 해외 협동조합 선진지로 연수를 보내고 직원 5명만 모이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교육지원도 하고 있다. 2014년 한 해에만 교육비로 2억원을 지출했다.
 “사람이 중요하니 사람에게 투자해야죠.” 그 돈은 인건비가 아니라 조합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라고 송 이사장은 생각한다. 많은 기업들이 말하는 인간 중심, 사람 중심 경영이 해피브릿지에서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경영의 구조와 관점을 바꾸는 동력이 되고 있다. 
 해피브릿지는 조합원, 즉 사원들의 창업도 적극 권장한다. 조합원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외식 창업을 하면 해피브릿지는 인큐베이팅 역할을 한다. 성공하면 새로운 가맹사업을 할 수 있으니 해피브릿지의 새로운 먹거리 사업이 된다. 매출이 늘어나는 만큼 조합원에게 소득과 복지로 재투자되니 조합원들의 자발성과 적극성을 더욱 강화하는 선순환 고리가 완성된다. 동료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과 연대로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것이 송 이사장의 포부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노동자협동조합인 몬드라곤협동조합은 자국 내 재계 7위이고 고용 순위는 3위예요. 몬드라곤협동조합은 다양한 협동조합 기업들과 연대해 어려울 때 서로 지탱해줍니다. 어렵다고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재교육해 다른 협동조합으로 배치하는 거죠.”  
 일자리를 제공하고, 원한다면 창업도 돕고, 모든 수익은 조합원에게 재투자되며, 실직의 위기가 닥쳐도 다른 협동조합과 연대해 안전망을 제공하는 꿈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송 이사장은 몬드라곤 모델을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 몬드라곤대학교의 교수를 한국에 불러와 해피브릿지연구소를 설립했다. 한국의 다른 노동자협동조합과도 연대하기 위해 대안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도 세웠다. 송이사장은 연합회의 초대 회장이기도 하다.
 
 취향에까지 침투한 자본을 걷어내려  
 
 협동조합이 밥벌이의 문제만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취향의 공동체’를 일구고 이를 더 확산하는 진앙지 구실도 하고 있다. 취향의 영역에도 자본의 논리가 침투해 있는데, 이를 걷어내는 방법으로 협동조합을 택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스크린다이제스트>에 따르면 2013년 한국인의 1인당 영화 관람 편수는 4.12편으로 세계 1위다. 할리우드가 위치한 미국보다 많고 최초의 영화를 탄생시킨 프랑스보다 많은 수다. 그런데 2013년 전국 244개 기초자치단체 중 영화관이 하나도 없는 지역은 전체의 45%인 109개 지역에 달했다. 영화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는 나라의 절반 지역에 영화관이 없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 때문이다. 영화관이 보기에 투자가치가 없는 곳은 문화의 사막이 된다.
 모두를위한극장공정영화협동조합(모극장)은 시민들에게 다양한 영화를 제공해 문화 다양성을 확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동조합이다. 독립영화 배급과 영화 교육사업을 한다.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영되지 않지만 의미와 재미가 있는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목적이다. “대기업 자본으로 만들어진 3개 멀티플렉스가 전국 영화관 스크린의 80%를 점유하고 있어요. 이 상태로는 좋은 영화라 할지라도 수익이 될 것 같지 않으면 관객을 만날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는 거죠.” 모극장의 김남훈 상임이사의 말이다.
 자본의 논리가 아닌 문화의 논리로 돌아가자며, 영화를 보고 싶다는 뜻을 가진 시민과 영화제작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팝업시네마(popupcinema.kr) 플랫폼을 개발했다. 지역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데 영화관에서 틀어주지 않는다면, 혹은 영화관 자체가 없다면, 시민들이 ‘공동체 상영회’를 열어 영화를 배급받을 수 있다. 모극장은 110편에 달하는 영화 목록을 인터넷에 올려 시민들이 영화의 기획·배급을 손쉽게 할 수 있도록 간소화했다. 유통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대관가능한 극장 정보도 함께 제공한다. 시민이 모이면 어느 곳에서든 영화관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해되는 가격’의 동물병원협동조합  
 
취향은 삶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에게 반려동물은 취미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 그런데 여기에도 신자유주의의 손이 닿았다. 1999년 동물병원의 담합을 막고 자율 경쟁을 도입한다는 취지로 의료수가제를 폐지했는데, 오히려 병원마다 진료비가 천차만별로 달라져 소비자의 불신만 높아졌다. 높아진 진료비로 치료를 포기하고 거리에 버려지는 유기동물의 수도 늘어났다.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물병원은 없을까?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우리동생)은 창립총회를 2013년 5월에 열고 2015년 5월 병원을 개원했다. 협동조합이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건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선례가 없으니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동생의 밑그림을 그린 정경섭 이사장은 반려동물에 대한 교육강좌부터 열었다. 조합원을 모으고 2억원의 출자를 받고, 여기에 더해 아이쿱(iCOOP)생협과 한국사회투자지원재단으로부터 1억원을 융자받아 병원 문을 열었다. 10월 현재 조합원 수는 1376명. 이들은 모두 5만원씩을 출자했지만 병원 개원을 위해 1천만원 가까이 출자한 조합원도 있다.
운영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동물병원이 과도한 진료비를 청구한다고 생각했는데, 각종 의료기기를 구매하고 임대료를 내다보니 진료비를 낮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진료비 책정 과정에 조합원들이 최대한 참여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결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김현주 사무국장이 설명했다. 1인 1표의 민주적 운영과 투명한 정보공개로 불신을 해소하고 무조건 저렴한 가격이 아니라 ‘이해되는 가격’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동물병원을 매개로 지역 공동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1인 또는 2인 가구들이 지역에 등장했다. 자녀를 매개로 부모들이 교류하듯 동물을 매개로 1인 또는 2인 가구들이 교류하며 관계망을 넓혔다. 조합원들은 동물병원 외에도 새로운 모임을 만들자는 의견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자신과 같은 취향,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신뢰는 더 빠르게 재생산돼 교류망이 더욱 촘촘해지기 때문이다.
  
 맹학교 동문이 뭉친 안마사 협동조합
 
 동물을 함께 보살피려는 세상에서도 장애인의 자리는 비좁다. 결국 그들끼리 뭉쳤다. 서울맹학교 출신 동문들이 모여 안마사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미 안마업은 시각장애인에게 배타적인 취업권으로 보장되어 있는데, 이들은 왜 협동조합에 나섰을까?
 “안마업이 뷰티산업으로 성장하면서 비장애인이 운영하는 타이·발·경락·스포츠 마사지 업소를 거리에서 보는 건 흔한 일이 돼버렸어요. 경쟁이 심해진 거죠.” 참손길공동체협동조합의 정경연 이사장에 따르면 이들 사업은 모두 현행법상 불법이다.
 의료법에 따라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업의 독점적 사업권이 보장된다. 비장애인이 마사지업이나 유사한 사업을 하는 경우 벌금 300만원을 부과한다. 하지만 안마의 수요는 증가하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 불법 마사지소는 빠르게 번지고 있다. 법으로는 배타적 업종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안마학교에서 2천 시간 이상 수련을 해요. 기술력은 뛰어나죠.” 문제는 자본이다. 뷰티산업이 5천억원 규모로 성장하면서 프랜차이즈 회사들이 자본금을 쏟아부으며 손님을 끌어모았다. 2013년 발 마사지를 하는 한 회사의 가맹점 수는 150개를 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혼자 극복할 수 없는 격차다.
 참손길공동체협동조합은 시각장애인 조합원이 각자 1천만원씩 출자해 그 돈으로 임대료를 내고 제법 큰 매장을 열었다. 인테리어도 어느 업소 못지않다. 최근에는 서울 사당점에 이어 강남 대치동에 50평 규모의 2호점도 개설했다. 10월1일 문을 연 대치점은 보름 만에 1호점 사당점의 매출을 추월했다.
 사당점과 대치점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인 조합원 수는 모두 22명. 쾌적한 공간에서 안마를 받을 수 있어 젊은 여성 고객들이 꾸준히 찾는다는 게 정경연 이사장의 설명이다. 조합원들은 각자 자신이 일한 만큼 급여로 가져가고 조합원으로서 의사결정에 참여해 배당의 규모와 운영 시스템을 통제한다. 급여는 평균과 비교했을 때 조금 나은 정도지만 시각장애인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동반자처럼 일을 한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참손길공동체협동조합은 그 목표와 뜻에 공감하는 누구나 소정의 교육을 거쳐 1천만원을 출자하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발달장애부모들의 울타리 ‘연리지’
 
장애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도 협동조합은 울타리가 된다. 대전에 위치한 연리지장애가족사회적협동조합(연리지)은 발달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이 모인 협동조합이다. 발달장애 자녀를 가진 부모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모임에서 시작됐다. “오죽하면 부모가 나섰겠어요. 부모가 나서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발달장애인의 미래가 불안하거든요.”
 연리지의 최명진 이사장은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 제정되면서 부모 스스로 학교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자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그전에는 학교에서 아이를 거부하면 왈칵 울면서 뒤돌아섰거든요. 이제는 당당히 요구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죠.”
 하지만 학교를 졸업해도 장애인의 삶은 계속된다. 현재 한국의 장애인 복지 시스템에선 20대 이후의 삶을 돕지 않는다. 그래서 연리지는 발달장애 청소년이 졸업 뒤 일할 수 있도록 세차사업을 시작했다. 세차는 분업이 가능한데다 집중 시간이 짧기 때문에 발달장애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장애인도 일할 수 있구나, 지역사회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구나’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 그게 저희가 사업을 하는 이유예요.” 이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협동조합을 택했다.
 대부분이 경쟁에 매달리는 시대임에도 협동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경쟁으로 상처 입을수록 협동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간절함은 ‘가능한 차선’을 뛰어넘어 ‘불가능한 최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인간의 인식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코기도 에르고 쿱’(Cogito Ergo Coop). 협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경쟁으로 분열된 시대에 협동을 삶의 원리로 삼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대한다. 8,211개의 협동조합을 응원한다.


구례가 덩실덩실 춤춘다


지난 10월31일 낮 12시 전남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전원마을 터. 버스 4대가 멈추자 전국에서 찾아온 조합원 200여 명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전원마을 택지의 주변 환경을 살폈다. 가까이는 굽이 도는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너른 들판이 낮게 엎드려 있었다. 고개를 들자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지리산 왕시루봉의 펑퍼짐한 산등성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읍내가 구례의 강북이라면, 이곳은 구례의 강남입니다.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일자리와 교육·문화·복지를 갖춘 생태공동체를 가꾸려 합니다.”
 
전원주택 설명회에 조합원 200여 명 ‘북적’
 
이날 설명회를 마련한 아이쿱(iCOOP)은 2017년까지 4만5천m²에 단독주택 72동을 공급하겠다고 소개했다. 건축사 김재화씨는 택지를 돌며 주택 디자인과 전선 지중화를 비롯해 커뮤니티센터의 기능, 자치위원회의 구성 등 전원마을의 장점을 상세하게 들려줬다. 조합원들은 휴대용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을 한 대목이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마을의 가장 높은 지대에선 한옥 한 채가 한창 올라가고 있었다. 한옥의 기둥과 들보 앞에 서자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서울 말씨뿐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 여러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남쪽이 어디죠?” “몇 층까지 짓는데예?” “수돗물이에유, 지하수에유?” “건축비는 얼매나 든다요?” 풍경을 사진에 담던 은퇴자 부부는 “구례는 자연이 좋아 늘 오고 싶은 곳이다. 이곳에서 살 수 있으면 행운이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는 전남 구례에서 아이쿱은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본보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안전한 식품을 원하는 조합원들의 열망을 디딤돌 삼아, 정부도 기업도 포기했던 농업 분야에 승부수를 던졌다.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낙후한 지역을 골라 사회적 경제의 성공 모델을 다진다는 청사진을 먼저 그렸다. 이어 청정 지역인 구례에 유기식품 집적단지를 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일자리·문화·교육·의료·복지가 어우러진 전원형 생활공동체를 가꾸는 실험을 한창 진행 중이다.
아이쿱은 2011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구례군 용방면 죽정리 농공단지 14만4천m²를 통째로 분양받았다. 물류단지 입지를 찾던 아이쿱과 농공단지 분양을 원한 구례군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아이쿱은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고, 구례군은 지원금 7억원을 내줬다.
아이쿱은 4년 동안 600억원을 들여 구례자연드림파크를 조성했다. 우리밀 라면을 비롯해 김치, 만두, 한과, 정육, 오리, 유정란, 막걸리, 글루텐(밀 등 곡류에 함유된 수용성 단백질) 등 유기식품을 생산하는 공방 15곳을 잇따라 지었다. 이 중에는 전분, 제분, 도정, 전처리센터 등도 포함됐다. 수제 맥주와 수제 치즈를 만들어냈고 앞으로 요구르트도 생산할 예정이다.
숲 속에 있는 구례자연드림파크는 외관이 단아해 공단이라기보다 공원이나 학교 같은 느낌을 준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조경과 건축이 방문자의 눈길을 끈다. 단지 전체를 분양받아 계획적으로 개발한 덕분이다. 내부에 들어서면 잔디공원을 중심으로 분수대와 그늘막, 산책로가 들어서 평화로운 분위기다. 이에 어울리게 시설의 이름도 공단 대신 ‘파크’, 공장 대신 ‘공방’으로 붙였다. 흔한 용어인 공장 대신, 생산자가 식품에 혼과 정성을 불어넣는 장소라는 뜻으로 붙인 공방은 어감이 친근하다. 견학 통로에서 방문자가 작업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건설비의 20%를 추가로 들여 공방을 지었다.
 
방문객만 9만4천 명, 구례 주민의 3~4배
 
이곳의 새로운 실험이 알려지면서 견학 일행은 갈수록 늘고 있다. 아이쿱의 78개 지역조합뿐 아니라 전국의 학교와 단체, 마을과 기관이 앞다퉈 방문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이곳을 찾아 조합 활동의 방향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우리밀로 라면과 만두를 생산하는 공방을 견학한다. 피자나 쿠키, 소시지나 케이크를 만들어 한 끼를 해결하는 체험에도 참여한다. 또 산 속에서 맥주나 커피를 마시거나 최신 개봉 영화를 즐기며 느긋하게 재충전을 하기도 한다.
주택설명회가 열린 이날도 광주엔지오시민재단, 100세시대대안포럼, 하남중촌마을향우회, 혁신도시건설지원단, 한려해상국립공원 등 10여 개 단체 50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주말에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점심때는 식당 건물 밖까지 긴 줄을 서야만 했다.
경남 사천에서 온 이서영(36·여)씨는 “보건소 아토피 치유교실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오게 됐다. 생태 탐방로를 걷고 친환경 간식거리를 만들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곳이 금세 좋아졌다”고 호평했다. 체험공방에서 만난 아이들도 표정이 밝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정은표(8)군은 “평소 원하던 대로 초콜릿을 듬뿍 얹은 케이크를 만들고 있다”며 즐거워했다. 이고은(8)양은 “피자 반죽이 생각보다 어렵다. 잘 구워서 동생이랑 나눠 먹겠다”고 웃었다. 영화관에서 만난 주민 오향화(60·구례읍 봉서리)씨는 “외지에서 찾아온 친지들을 꼭 데려온다. 산골에 하우스맥주, 북카페, 개봉 영화 등 별별 게 다 있다며 다들 깜짝 놀란다”고 전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지난해 4만6천여 명, 올해는 10월까지 9만4천여 명을 기록했다. 한 해 동안 구례 주민의 3~4배가 방문한 셈이다. 지난 8월 잔디공원에서 열린 록페스티벌에는 4천여 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서울에서 330km 떨어진 지역의 행사인데도 대박이 나서 주민과 직원을 들뜨게 했다.
여러 공방들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서 구례자연드림파크는 2012년 152억원, 2013년 247억원, 2014년 366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조합원한테 주문받은 식품의 생산·수집·가공·배송을 같은 공간 안에 계열화한 데 따라 인력과 비용의 절감 효과도 나타났다. 사업 과정에서 현지 농산물을 사들이고, 현지 주민들을 채용한다는 원칙도 일관되게 지켜지고 있다.
 
2년 만에 매출 2배, 직원 평균나이 36.2살
 
이곳은 올해 들어 밀·배추·부추·파·버섯 등 20여 가지 농산물 10억4천만원어치를 구례에서 사들였다. 가공식품 원료가 75%, 식당의 식재료가 25%를 차지했다. 전국의 아이쿱 사업체들이 지난해 구례에서 구매한 농산물을 합치면 20억원에 이른다. 여태껏 구례에선 어렵게 농사를 지어도 판로가 없어 고민해왔다. 이곳이 문을 열자 농민들은 쌀과 밀, 고사리·취나물·쑥부쟁이 등 각종 농산물을 걱정 없이 팔 수 있게 됐다. 김영택 군 도시경제과장은 “아이쿱 덕분에 구례 농민 모두가 유기농 재배로 전환했다. 작게는 마을경제, 크게는 지역경제에 활력이 붙으면서 ‘인구 3만 명 회복’이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반겼다.
이곳의 직원 430명 가운데 현지 주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80%에 달한다. 읍내에 있는 전남자연과학고(옛 구례농고) 졸업생만 39명이다. 나이별로는 30대가 133명으로 가장 많고, 20대 122명과 40대 113명이 뒤를 잇는다. 평균연령은 36.2살로 주민의 평균나이인 50대 초반보다 훨씬 젊다. 안내를 담당한 직원 모란(28·구례읍 봉동리)씨는 “일터가 가깝고 보수도 괜찮아 만족한다. 친지들도 좋아해서 후배들한테도 취업을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례자연드림파크는 최근 비어락하우스, 게스트하우스, 피트니스센터, 휴센터, 가족호텔 등을 지으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이제는 자리가 비좁아 2차 단지를 물색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유기식품 분야의 기반이 탄탄해지자 아이쿱은 지역사회 공헌 활동을 본격화했다. 구례에 없었던 영화관을 새로 열고, 산부인과 병원을 개설하는 데 앞장섰다. 앞으로 소아과와 피부과 병원도 열겠다는 구상이지만, 읍내에 있는 치과는 피하기로 했다. 신성식 아이쿱생협사업연합회 시이오(CEO)는 “협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상생 모델을 구례에 구현하려 한다. 주민이 원하는 개봉영화관이나 청소년센터 등을 공익적 차원에서 운영하되 가능하면 수지를 맞추려 애쓰겠다”고 말했다.
구례를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려는 아이쿱은 교육과 주거의 수준을 높이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구례의 학생들한테 실습과 인턴 과정을 열어 한 발짝 다가서고, 해마다 적지 않은 장학금과 일자리를 제공해왔다. 올해는 지역의 학교에 장학금 4700만원과 시설비 1천만원을 전달했다. 11~12월 매주 화요일 저녁엔 ‘지역,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이라는 주제로 군민과 직원을 위한 교양강좌도 이어간다.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
 
귀촌자와 젊은 층이 자연 속에서 도시 수준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전원마을 사업도 반응을 봐가며 차츰 확대하기로 했다. 장시준 구례교육장은 “구례는 급격한 이농으로 한때 7만8천 명이던 인구가 2만7천 명까지 줄었다. 자연드림파크가 들어오면서 용방면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학령 아동이 늘어 올해부터 유치원을 개설했다. 지역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놀라운 변화이자 희망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농협은 되고 협동조합은 안 돼?


협동조합이 늘어나면서 그 가능성에 주목하는 시선이 늘었다. 동시에 협동조합에 시비하는 시선도 생겨났다. 부실한 협동조합에 국고를 댄다거나, 실정법을 어기는 협동조합이 많다거나, 심지어 협동조합이 시장경제에 암적 존재라는 주장까지 출몰하고 있다.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다양한 사회 문제까지 함께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를 활용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모르는 데서 비롯한 일이다. 아울러 그런 세계적 기준을 따라잡지 못하는 국내 법·제도, 그리고 주무 관청의 탓도 있다.
현재 한국에는 8개의 협동조합 개별법(농업협동조합법·수산업협동조합법·산림조합법·신용협동조합법·새마을금고법·중소기업협동조합법·엽연초생산협동조합법·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1개의 협동조합기본법이 있다. 복잡한 법체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협동조합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막아서는 걸림돌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협동조합은 시장경제의 보완재
 
2010년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생협법)이 전부 개정됐다. 이에 따라 협동조합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를 공급할 수 있도록 사업 범위가 확대됐다. 협동조합 간의 협동을 위한 연합회를 설립할 수 있게 됐고, 공제사업을 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됐다. 공제사업은 조합원과 그 가족이 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고와 위험에 공동으로 대비하는 사업이다. 이윤을 남기려는 목적의 일반 보험에 비해 생협의 공제사업은 가입자에게 제공되는 혜택이 크다. 일본의 생협에선 매우 활성화돼 있다.
하지만 생협법 개정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국의 생협들은 공제사업을 할 수가 없다. 생협이 공제사업을 하려면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시한 기준에 맞게 공제 규정을 만들어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공정거래위는 기준을 만들지 않고 있다. 감독 기준이 없으므로 생협이 공제 규정을 만들 도리가 없다. 지난해와 올해 국정감사에서 연이어 지적되고 있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 늦어도 너무 늦다.
관련 법체계가 복잡한 만큼 주무 부처와 유관 부처도 복잡하다. 칸막이 행정으로 인해 이들 간의 협조와 조율이 좀체 이뤄지지 않는다. 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정책과 제도의 정비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농민은 농협 조합원이다. 농협은 지역 농산물을 공동판매하는 등의 구실을 한다. 이들 지역농협은 비영리법인으로 인정받아 법인세 등 세금을 감면받는다. 그런데 같은 지역 농민들이 농산물 공동판매를 위해 조합을 만들면, 이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법인으로 간주되어, 주식회사와 동일한 수준으로 세금을 낸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농협은 농협법에 근거해 만들어졌고, 자발적 농민협동조합은 협동조합기본법에 의해 설립된 일반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기본법에 의해 설립된 일반협동조합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체로 간주된다. 하지만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농협·수협·새마을금고·신협·생협 등 개별법에 의해 설립된 협동조합들은 비영리법인으로 인정된다. 근거 법이 다므로 혜택도 다르다는 것인데, 같은 사람이 같은 목적으로 활동하는 두 조합이 왜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부터 혼란스럽다.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관료를 만난 적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뿐이 아니다. 국내법에 따르자면,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 조합원이 아닌 일반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면 불법이다. 지난 10월 한국을 방문한 이탈리아의 유명한 협동조합, 레가쿱 에밀리아로마냐의 조반니 몬티 회장은 놀라워했다. 이탈리아에는 그런 법이 있지도 않지만, 그런 규제가 있다 해도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협동조합연맹 생협분과의 전 사무총장 로드리고씨에게도 전자우편으로 자문을 구했었는데, 유럽에서 비조합원의 소비자협동조합 사업이용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국내에서도 다른 개별 협동조합법은 조합원의 이용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일반인 상대의 사업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협동조합을 협동조합기본법이 아닌 생협법을 근거로 만들 경우에만 비조합원의 사업이용이 불법이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이치에 닿지 않는 이런 실정법을 어긴다고 협동조합을 탓하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   
 
복잡하고 일관되지 않은 법 적용이 걸림돌
 
일선 협동조합에 대한 지도 점검은 보통 지방자치단체가 담당한다. 지난해 말, 한 협동조합에 공무원이 점검을 나왔다. 그는 “조합원의 출자금은 써서 없애면 안 되고 통장에 고이 모셔두어야 한다”고 ‘지도’를 하고 갔다고 한다. 출자금은 협동조합의 사업을 위해 유용하게 쓰여야 하는 돈이지 보물단지처럼 예쁘게 모셔둬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은 관료만이 아니다. 지난 9월 한 시사주간지는 아이쿱생협이 조합원으로부터 자금을 차입 받아 고유한 목적사업에 사용한 것을 ‘불법적인 유사수신행위’로 규정하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이른바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공동사업을 위해서는 출자금보다 많은 자금이 소요되는 일이 있다. 오래된 협동조합은 그동안 쌓인 자산을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수 있지만 신생 협동조합은 축적된 자산이 없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 때문에 이웃 나라 일본의 많은 생협들은 조합채를 발행해 조합원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한다. 일정하게 이자를 지급하고 조합원에게서 돈을 빌리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생협도 조합원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유명한 스페인 몬드라곤도 큰 규모의 채권을 발행해 사업에 투자·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협동조합기본법과 생협법에 의해 설립된 협동조합은 ‘출자금’ 외 다른 자금 조달 수단이 전혀 없다. 해외 협동조합은 물론 국내 농협·신협은 출자금만이 아니라 채권발행제도, 다양한 조합원·비조합원 투자제도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이런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의 미비를 따지지 않고, 조합원의 자조와 자생을 위한 국내 생협의 노력을 ‘불법’으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2013년 정부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협동조합들이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가 자금 조달이다. 현행 협동조합기본법은 협동조합의 금융 또는 보험 사업을 금지하고 있다. 금융 당국의 견제와 우려가 컸다. 하지만 중소기업은행이나 산업은행처럼 협동조합을 위한 특수은행이 없고, 조합원 간의 상호금융도 할 수 없고, 일반 금융기관에 대출을 받으려 해도 담보가 없어 어렵고, 연대보증은 구성원들이 꺼리고, 신용대출은 꿈도 꾸기 어려운데, 무슨 수로 자금을 구할 것인가.
이때문에 협동조합에 관심을 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도 변경만 바라지 말고, 협동조합을 돕는 협동조합 금융을 협동조합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분출하고 있다.
 
미국·일본과 달리 꽉 막힌 자금 조달
  
세계적으로 보아 협동조합의 역사는 200년 가까이 된다. 한국의 협동조합은 이제 걸음마 수준이다. 그나마 기초적 법률인 협동조합기본법이 만들어진 것이 겨우 3년 전이다. 제대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이 많지 않다거나, 자립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정부 지원에만 의존하려 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관련 법·제도를 제대로 정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협동조합 혼자 알아서 날고 뛰라고 하는 게 오히려 무리 아닐까. 그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제대로 된 협동조합,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협동조합이 곳곳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서툴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세계적인 협동조합 권위자였던 이언 맥퍼슨 캐나다 빅토리아대 명예교수가 2년 전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뜨기 10개월 전 <한겨레>와 만나 “협동조합이 경제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을 남겼다. 40년 넘게 다양한 협동조합 운동을 벌였던 맥퍼슨 교수가 “승자독식이 아닌, 서로 협력하고 나누는 방식의 협동조합이 경제민주화를 이끌고 경제위기의 안전판 구실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협동조합이 경제민주화 이끈다”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는 자본주의 기업과 달리 협동조합은 한 사람이 한 표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에 뿌리를 두고 운영된다. 협동조합에서는 소비자와 생산자 및 노동자가 바로 주인이고 이들에게 ‘최선의 가격’을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존재 이유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기업인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협동조합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했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쓰러져가는 반면 협동조합 기업들은 대부분 건실하게 사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고용을 유지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09년 협동조합 기업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하면서 위기에 강한 협동조합 사업모델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촉구했다. 유엔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2012년을 ‘세계 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 한국에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협동조합기본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탔고 마침내 2012년 12월부터 시행됐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따르면 전세계 94개국에서 140만 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다. 조합원 수로 따지면 10억 명이 훌쩍 넘고 협동조합 기업과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일하는 사람도 2억5천만 명이나 된다. 협동조합의 뿌리가 깊은 나라에서는 협동조합이 실핏줄처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특히 캐나다와 뉴질랜드에서는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 협동조합원이다. 프랑스는 35%, 이탈리아와 미국은 25%가량의 국민이 협동조합원으로 활동한다. 이들 나라에서 협동조합 기업들은 농업뿐만 아니라 유통과 금융 분야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진다. 협동조합이 국민의 생활경제를 좌우하는 밑바탕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3년 만에 무려 8천여 개의 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조합원 수와 출자금 규모에 대한 제한이 없어지면서 봇물 터지듯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 싶다. 이에 대해 협동조합의 대가로 불리는 스테파노 자마니 이탈리아 볼로냐대 교수는 “세계적으로 이렇게 빨리 협동조합이 성장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캐나다·뉴질랜드, 인구 40%가 협동조합원
 
 국내 협동조합 기업의 유형은 사업자 중심, 소비자 중심, 직원 중심, 다중이해관계자 등 4가지로 나뉜다. 현행법상 협동조합 기업이 택할 수 있는 업종은 금융과 보험업을 빼고 모두 가능하다. 실제로 의식주 등 일상생활의 필요에 따른 서비스와 제품을 만들어 제공하는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 기업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협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목소리가 벌써 나오고 있다. 지난 9월 한 경제신문이 ‘협동조합 90%는 좀비’라는 자극적 제목을 붙여 특집 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동조합을 지원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헛돈만 쓴 꼴이 되고 말았다”고 비난하면서 이만우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기획재정부에서 받은 자료를 근거로 들었다.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이후 전국에 들어선 협동조합 중 그나마 운영되는 건 10%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거나 활동이 미미해 수천억원의 정부 지원금만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료를 만들었다는 기재부는 이런 보도가 객관적 근거나 자료가 없는 추정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협동조합의 주무부서인 기재부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2013년 1차 협동조합 실태조사에서는 조사 대상 조합 1209개 중 54.4%가 사업을 운영 중이었고, 올해 2차 실태조사를 하고 현재 집계를 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11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지원자금의 규모가 수천억원에 이른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을 위한 각종 정책자금을 모두 협동조합 지원으로 오해한 것이라는 게 기재부의 설명이다. 실제 기재부는 협동조합들의 자생력 제고를 위해 직접적인 재정 지원은 하지 않고 교육·컨설팅·설립 지원 등 간접 지원만 하고 있다.
 170년이 넘는 오랜 전통을 가진 외국의 협동조합 운동에 견줘보면 우리의 협동조합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시장만능주의,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살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성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협동조합에 필요한 협력과 연대의 경험을 쌓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게다가 협동조합 기업을 잘 꾸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업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을 잘 벌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운영이 민주적이어야 하고, 지역사회에도 기여하고 다른 협동조합과도 협력하는 등 협동조합의 일곱 가지 원칙도 지켜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협동조합 기업이 가는 길은 그 첫걸음이 더디고 서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협력과 연대의 가치는 꼭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전국 곳곳에서 일고 있는 협동조합 기업들의 실험은 성패를 떠나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협동조합을 하면서 빠르게 성과 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끼리 협동하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협동조합을 비즈니스로 운영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이런 것이 준비되지 않은 채 너무 빨리 성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협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운영할지를 생각하며 천천히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협동조합 설립을 지원할 때 이런 점을 꼭 고려해야 한다.” 노구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국을 찾았던 맥퍼슨 교수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당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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